■ 11월 14일

오늘은 코미티아 만화행사를 가기로 한 날. 그리고 밤에는 다시 교토로 돌아가야 한다.

 
기상. TV를 틀어보니.. 일본 시리즈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어!   좁다란 호텔 복도다. 좁은 곳엔 죄다 저렇게 거울을 붙여 착시를 노렸더군.
 
일본 제일의 화구/문구 판매점 세카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신주쿠 본점과 딱 마주쳤다.
 
아아, 내가 찾던 물건들이 여기 다 있구나. 각종 자료집들과 디지털 워크, 만화 용지 전체를 다 빼오고 싶었다. 으으.. 책은 무거우니까 이번 여행동안 전혀 살 예정이 없었는데.. 자료집들이 너무 탐이 나 그 자리에서 2권을 구입했다. 유로피안 소재 모음집(자료 CD포함)과 민족의상 자료집. 아, 근데 이거 한국에서는 어디 파는 곳 없나? 나중에라도 시리즈 전부를 구입하고 싶다.
 
행사장이 있는 오다이바로 출발.   국제전시장 역을 내리니 1시가 좀 넘어있었다. 생각보다 머네..
 
북해도에서 온 모에 푸딩은 뭥미?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들이키며 빅 사이트로 향했다. 만화 축제가 있는 날인데 어째 만화인들은 거의 없고 양복입은 젊은이들만 잔뜩 있네? 다른 행사 도우미들로 모인 건가 아니면 설마! 뒤늦은 스미스 놀이 참가자들은 아니겠지... 알고보니 같은 날 빅사이트 동관에서 커리어 포럼, 즉 취업박람회가 열렸더라고.
 
이것이 빅 사이트로구나! 무기는 어디 숨겨져 있죠? 변신은 언제 하나요?

이쯤에서 코미티아란 행사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하자면, 패러니물이나 2차 저작물을 완전히 배제한 100% 오리지널 창작물 온니의 아마추어 동인행사가 바로 이 코미티아다. 상업 작품의 패러디물이 없기 때문에 규모도 참가인원도 작다고 하지만 되려 나와는 딱 들어맞는 행사가 아닐 수 없다. 동관보다 조그만 서관의 1,2관만을 사용하는데 그래도 동경 행사는 참가 부스가 2-3000개를 상회한다고 한다.
 
 
입장료는 코미티아 오피셜 가이드북을 구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300페이지가 넘는 가이드북의 가격은 1000엔. 공식 홈에서 보기로는 가이드북이 다 팔리면 그 이후부터는 무료입장이라던데, 산처럼 쌓여있는 책들이 전혀 다 팔릴 거 같지 않았다(...). 형과 나, 각각 한 권씩 구입해서 입장.
 

입구 근처엔 참가 회지의 견본들을 모아놓은 특설 부스가 있어 굳이 회장 안을 헤매이지 않더라도 많은 회지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대략 살펴보니 그 형태와 장르들이 참으로 다양했다. 레벨 차이도 중고생 수준에서 준프로급가지 각양각색. 일본 동인들이라 하면 언뜻 우리네들보다 다들 고레벨의 필력을 가졌을 것 같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평균을 낸다면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그러나 원고에 쏟는 열정들은 진정 대단해보였다. 단행본 분량으로 자신의 회지를 내놓은 사람들이 상당수였다니까. - 왕비 시리즈도 이곳에 오면 그저 평범한 동인지의 하나일 뿐이로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회장 안에 있던 참가자들 그 자체였다. OL 스타일의 아가씨 무리와 수염이 더부룩한 아저씨들,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 등등 부스 안에 앉아 있는 동인들의 연령이 결코 적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다. 되려 어린 학생들은 거의 보이질 않아 '여기 참가한 사람들 중 우리보다 어린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싶을 정도였다. 과거 코미케 관람 경험이 있던 형도 "코미케는 애들 판이었는데"라며 혀를 내둘렀다.
 
선데이, 모닝, 강강 등 여러 잡지사의 기자들이 파견나와 직접 원고 상담을 해주는 부스. 동인들이 각자의 회지를 들고다니며 여기저기서 상담받는 모습이 이채롭다. 또한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렇다. 이 코미티아는 프로를 꿈꾸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곳이다. 나이가 들고 현재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만화가가 되리라는 꿈을 놓지 않고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꿈을 잃지 말아라, 이런 상투적인 말따위 새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미 모두가 다 이렇게 행하고 있으니까.

참으로 경탄스럽다. 그리고 그 탄성은 이내 뼈저린 자기반성으로 돌아왔다.
 
만화 대학에서도 출장 강연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아리아케 역의 경전철 - 유리카모메를 타고 가기로 했다. 언뜻봐도 일반 시민들의 모습은 거의 없어뵈는게 사실상 관광객 전용이 아닌가 싶었다. 노선 자체가 시내까지는 연결이 안 되어 있다고 하니까... (적자 폭이 얼마나 되려나?-;-)
 
 
오, 저기가 오다이바 선박과학관인가? 언젠가 크루저 여행도 해보고 싶다.   빙글빙글.
 
종점 신바시역에 도착. 일단 이곳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음 목적지인 하라주쿠로 향했다.
 
하라주쿠 도착.   날이 추워서 그런지 신기하게 입은 애들은 별로 없는 걸.
 
 
하라주쿠역 바로 옆에 메이지 신궁이 있어 안에 들어가 산책을 좀 했다. 초반만 적당히 둘러보고 다시 나와 걸으니 곧 요오기 공원에 당도했다.
 
 
5시가 다 되어 이제 곧 문을 닫아야 하는데도 공원 곳곳에 거리의 예술가들이 넘쳐났다. 웃통을 다 벗고 힙합 댄스를 추는 팀, 고스로리 옷을 맞춰입고 좌우 스텝을 밟고 있는 팀, 원주민 풍의 타악기를 끝도 없이 두들기는 팀, R&B 사운드를 연습하는 팀, 개그만담쇼를 연습하는 팀, 소품 하나 없이 행위예술에 심취한 팀, 신흥 종교의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팀, 개떼를 몰고 다니며 다른 개들과 함께 개판을 만들고 있는 팀, 코미티아를 다녀온 얼빠진 한국인 팀 등등 온갖 사람들과 고요와 혼란이 공존하는, 가히 카오스 파크라 부를만한 곳이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렇게 오픈된 거리 예술의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잖은가? 그 넘치는 흥겨움이 참 부러웠다.
 
 
모스버거에서 요기를 한 다음 우선 시부야까지 거리 구경을 하면서 걷고, 거기서 다시 야간버스가 출발하는 신주쿠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이제는 발이 편하니까 문제가 없거든. 모스버거는 일본 오리지널 브랜드의 패스트푸드 점이었는데 맛은 괜찮았지만 버거들이 다 쪼만~했다.
 
시부야의 클럽 세가에서 <드럼 V7>과 <유비트>, <리플렉 비트>를 플레이하다. <리플렉 비트>는 터치 스크린을 이용해 떨어지는 노트를 튕겨내는 방식의 신작 리듬게임인데(코나미 作) 어째 화면과 노트 스킨이 디맥 테크니카와 많이 흡사하다. 이거 역관광 시킬려고 의도한 건가? 거 참.. 북오프도 있길래 좀 구경하다 나왔음.
 
캡슐호텔이 이제야 눈에 쏙쏙 들어오는 걸.   코인로커 봉인이 딱 오늘까지로군.
 

신주쿠 다시 도착. 대략 저녁 8시쯤이었다. 편의점에서 야간버스의 입금을 한 후 맥주 한 캔을 사서 나눠 마셨다. 그리고 다시 거리 탐방.

어휴, 신주쿠는 다시 봐도 복잡 그 자체로구나. 아닌게 아니라 어제 전철타고 신주쿠역으로 오면서 안내방송을 자세히 들어봤었다. '어느어느 노선으로 갈아타실 분은 이번 신주쿠 역에서 하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이거 말이다. 갈아탈 수 있는 노선을 몇 개나 말하나 하나하나 세어봤더니 무려 8개를 말하더라. 정말이지 일본은 지하철 노선 중복이 대단하다. 하나의 지역에 이름 다른 노선들이 몇 개씩 쌓여있고 갈아타려면 만척씩 또 걸어야하고 걷다보면 또 다른 역이 나오고..; 서울 지하철은 진짜 대단한 최첨단이라니깐.

신주쿠에 있는 몇몇 게임 센터들을 둘러봤다. 아즈망가 퍼블버블도 신기했지만 클럽 세가에 <샤이닝 포스 크로스레이드>의 로케테스트판이 있어 놀랐다. 전작의 카드도 그대로 쓸 수 있었지만 일단 <크로스>를 클리어한 데이터가 있어야 새로운 시나리오를 할 수 있더라. 흠. 이거 국내에 있음 간간히 플레이할텐데 말이지. 콘솔로 이식할 계획은 없으려나.

 
엄청나게 큰 요도바시 카메라 지점이 있어서 컴퓨터 주변기기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전날부터 인튜오스3에 갈아끼울 타블렛 심을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찾아보니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가격이 비쌌다. 다른 타블렛들이나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나옴. 대짜 타블렛 모니터는 언젠가 작업에 써보고 싶다. 펜선하는 데 나름 유용할 거 같은데. 근데 가격이 22만엔이시네.

거리를 걷던 중 파친코 야간 알바 모집 공고가 있길래 잠시 들여다보았다. 야간 기본 시급이 1100엔, 경력이 붙은 심야 타임에는 1550엔까지 준단다. 원화로는 대략 2만원이니 하루 대여섯 시간만 일한다 쳐도 월 300에 연봉 4000만원 돈이 아닌가. 대학 포함 16년을 죽도록 공부해 한국 사회 상위 5%라는 대기업 또는 공기업에 취직해봤자 일본 오락실 알바만큼도 벌지 못하는 셈이니, 정말 대단한 환율 차가 아닐 수 없다.
 
또 다시 간첩 접선하듯 야간 버스를 탔다. 10시 20분에 출발하는 버스였는데 차가 막혔는지 다소 늦게 도착했다. 더구나 우리가 앉은 자리는 의자 밑에 뭔 구조물 같은게 놓여있어서 다리를 쭉 펼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뭔 시츄에이숀? 불편한 자세로 자다보니 중간에 2번 정도 깼었다. 하지만 휴계소는 귀찮아서 안 내렸다..
 

■ 11월 15일 - 귀국

울고짜고 보채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일본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교토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 40분이었다. 예정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다니! 내가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필리어스 포크였다면 팁을 쥐어 주었겠지만 나는 포크 씨가 아니니까. 그냥 쿨하게 내렸다. 그리고 어차피 집에 가는 시내버스가 올 때까지 20여분을 기다려야했다.

체인점의 규동 정식을 잽싸게 해치우고(아.. 낫토 못 먹겠더라) 만 사흘만에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7시경. 형은 잠시라도 자겠다며 침대에 누웠고 나는 잽싸게 귀국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책들은 모두 가방 밑바닥에 깔고 빨래거리는 비닐 봉지에 단단히 봉해 넣었다. 머리 감고 양치하고 면도까지 끝내니 대략 8시. 막 기상한 형과 함께 오사카 덴덴타운으로 향했다.
 
안녕 교토..   일단은 오사카 난바역까지 가기로 한 두 사람.
 
완전히 오픈되어 있는 기관실의 모습이 정겹다.   9시쯤 난바에 도착. 출국시간을 고려하면 그닥 여유가 없었다.
 
코인로커에 짐을 맞겨놓고 난카이 난바역까지 걸어왔다. 생각보다 지리가 복잡해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마침 나타난 북오프에서 <데스 스마일즈2X>와 DS판 <발키리 프로파일>을 구입했다.
 
게임센터도 패스패스.    
 
이른 시간에 와서인지 아직 문열지 않은 상점이 많은 덴덴 타운이었다. 아키바처럼 커다란 구조물이나 거대 상점들은 적었지만 그래도 만화, 캐릭터, 게임, 성인 등 장르별로 있을 건 다 있어보이더라. 메이드 카페는 아주 적어보였지만 또 모르지. 월요일 아침이라 판촉을 안 하고 있던 것뿐인지도.

wanpaku라는 중고게임 체인점에 들어가 엑박판 <오퍼레이션 다크니스>와 DS판 <유그드라 유니온>, <루미네스 아크2>, <늑대와 향신료>를 구입하며 일본에서의 모든 쇼핑을 끝냈다. <루미네스 아크1>과 <늑대의 항신료>, <유그드라 유니온>과 <서몬나이트2>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엔 분산투자를 선택한 나였다. 돌아오는 길엔 중고 PC점에서 부품들을 구경했다. 386시절의 부속들까지 차곡차곡 보관해둔 것이 적잖이 신기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먹은 카레. 굉장히 맛있었다.   멜론 북스가 저기구나. 발걸음을 재촉하느라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다소 돌아온 느낌이 들긴 하지만   JR 난바역에 무사히 도착. 1시 10분발 칸사이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입국할 땐 몰랐었는데 칸사이 공항 규모가 상당히 크더라. 서둘러 탑승 수속을 했으나 그래도 창가 쪽에 앉지 못해 아쉬웠다. 면세구역에 들어가니 이곳에도 서점이 있더군!(와, 이 사람들 참). 대기실 어느 한구석에는 무료로 인터넷을 할 수 있도록 노트북을 놔둔 곳이 있었다. 지난 6일간 웹서핑을 거의 하지 못했으므로 비행기 탑승 전까지 성남의 우승 관련 소식을 찾아 실컷 읽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삼각 김밥을 먹기 위해 일어났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상품을 걸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자는 통에 잠이 싹 달아났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이 즐겁게 게임을 하더라.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어서 고도가 내려갈 때 기체가 많이 흔들렸다. 이제 내 목숨도 여기서 끝이구나- 싶었는데 시시하게도 무사히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끝이 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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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