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만이로군..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치 않은 경기,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조별예선 통과도 못하고 가장 먼저 탈락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끈덕지게 승리를 거듭해 온 우리의 성남. 이젠 K리그의 다른 3룡을 포함한 모든 동아시아 팀들이 탈락하고 유일하게 성남만이 4강에 남았습니다. 4강전 상대는 전북을 꺽고 올라온 사우디의 강호 알 샤밥. 원정 1차전에서 3-4의 짜릿한 역전패를 당하고 돌아온 성남인지라 홈에서 벌어지는 2차전은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 결승전이 열리는 도쿄 국립경기장으로 갈 수 있었죠.

토너먼트 들어서 모든 ACL 경기가 그래왔지만, 올시즌 이보다 더 중요한 경기는 없었습니다. 홈구장을 향하는 저의 발걸음도 어느 때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고요. 절대 경기 시작에 늦지 않겠노라며 무려 경기 2시간 30분 전에 집을 나섰죠. 그런데 퇴근길에 버스가 막히면서 15분을 늦었습니다. .... ..... ......뭐야.. 이건-

 

■ 라인업

성남 라인업 : 정성룡, 조병국, 사샤, 홍철, 고재성, 김성환, 전광진, 김철호, 몰리나, 라돈치치, 조동건

---몰리나----라돈치치----조동건---
--김철호------전광진------김성환--
홍철-----조병국-----사샤-----고재성
-------------정성룡---------------

- 경기전날 인터뷰에서 김성환을 미들로 쓰겠다던 감독님의 말씀이 레알이었구나. 사실 선뜻 이해가 안 되는 선수 구성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김성환은 수비적인 롤에 적합한 선수이고, 이미 선발 라인업에 전광진-김철호라는 기존 더블 볼란치 라인이 들어가있는 상황에서 굳이 수미 한 명을 더 넣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거든요. 안 그래도 반드시 이겨야하는 2차전인데 말이죠. 그러나 경기 후 감독님의 코멘트는 명료했습니다. 알 샤밥의 에이스인 카마초를 막기 위해 성환이를 맨마킹으로 붙였다는 것.

알 샤밥 라인업 : 왈리드, 타바레스, 나이프, 마예드, 하산, 송종국, 알카브리, 압둘라, 카마초, 나시르, 올리베라

- 1차전과 달리 타바레스, 송종국이 선발로 나왔습니다. 수원 출신 스트라이커 올리베라도 건제.

 
우라와전 땐 꽉 찼었는데.. 사실 평소에도 사람이 이 정도는 되야;;   성일여고에서 또 출동했었구나


■ 전반전


헐레벌떡 경기장으로 들어서 우선 전광판부터 확인했습니다. 0:0이 찍힌 걸 보고 큰 한 숨을 내쉬었죠. 프런트의 노력으로 E석에 사람이 제법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우선 전반은 출입구에서 가까운, 엔드라인 쪽 좌석에 앉아서 보기로 했지요. 덕분에 첫 골 장면을 상당히 제대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전반 31분, 조동건이 터트린 환상적인 골! (▶) 볼의 루트는 고재성의 크로스 > 조병국의 헤딩 > 조동건의 발리슛입니다. 직전에 있었던 몰리나의 코너킥 찬스 때 조병국 선수가 PA로 올라와있던 것이 결정적인 도움으로 이어졌죠.

첫 골이 일찍 나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비겨도 결승에 가는 알 샤밥으로선 90분 내내 수비진형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충분했거든요. 침대축구를 대비해 전반에 골을 넣겠다던 감독님의 호언이 이번에도 적중했습니다.

이후 성남은 김철호의 중거리 슛 등을 포함해 몇 차례의 공격을 펼쳤지만 추가골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라돈의 비비기와 몰리나의 돌파는 평소와 다름없이 빛을 발했으나 알 샤밥의 수비진도 제법 견고한 모습이었어요. 미들을 내줄지언정 슈팅 찬스를 많이 주진 않았다-라고나 할까요. 카마초를 따라다니던 김성환이 PA까지 올라와 벼락같은 슛을 두어차례 때린 기억이 나는군요.

 
     
 
정지된 볼은 모두 그의 것   성환이가 올라오니 어색하네
 
선제골 먹을 때 타격을 입은 왈리드   그럭저럭 괜찮은? 판정을 한 심판
 
     
 
전반종료 직후 시비가 붙은 샤주장. 중후하지만 한 성질 한당께;   AFC 주관대회라 모르는 스폰서들이 붙어있군. 누가 저 호텔에 갈까?
 

■ 후반전

모두가 알고 있듯 올시즌 성남은 물 먹은 습자지에 버금가는, 대단히 얇은 스쿼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별로 자랑할 건 아닌가). 그런 와중에도 리그와 챔스 모두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으니 주전 선수들의 피로도는 다른 어떤 팀들보다 심한 수준이었죠. 이날 경기에서 추가골이 더더욱 간절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후반전 어느 시점에서 위기는 반드시 올 것이다. 미리 리드폭을 벌려놓지 않으면 나의 똥줄은 더이상 태울 수도 없는 하얀 재만 남길 때까지 타오르겠지.

....그리고 그 말처럼 됐습니다.

교체 투입된 송호영이 2번의 결정적 찬스를 날려먹으며 모두를 뒤집어 놓았고, 알 샤밥의 결정적인 슈팅 2개를 정성룡이 연거푸 막아내며 다시 모두를 뒤집어 놓았죠(어라.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반 말미 알샤밥이 몰아치던 시간들은 가히 스티븐 킹 원작의 호러 영화를 보는 듯 무서웠어요. 경기 내내 견고했던 좌우 측면이 점점 벌어지면서 미들진은 수비가담 하느라 정신 없었죠. 막판 조재철이 들어와 간극을 좀 메우긴 했지만, 마지막의 흐름은 정말 정말 위험했어요. 송종국이 돌파해 들어갈 때 관중들이 어찌나 쌍욕을 퍼부어대던지..-_-;; 어휴. 그래도 몰리나의 뛰어난 볼 간수능력이 있었기에 역습 상황에서 시간을 많이 벌 수 있었습니다.

길었던 4분의 추가 시간마저 모두 흐르고.. 결국 1:0으로 경기 마무리. 양팀 전적 1승 1패, 골득실도 4:4로 동률이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성남이.. 마침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게 됐습니다!

 
후반전 자리 이동   수비가 넘 많지 않아?
 
오늘 경기의 숨은 공로자    
 
    새로 깐 잔디 위에 잠시 누워있었던 우리 선수들
 
급한 나머지 파울을 남발하는 알 샤밥 선수들   시즌 내내 정신없이 뛰어다닌 철호.. 너마저 군대를 가면-_ㅜ..
 
종료!    
 

■ 이제는 결승이다!!

시즌 중 언젠가 제가 지껄인 적이 있었죠. 이렇다할 보강도 없었던 성남이 올 시즌 리그 혹은 챔스를 우승한다면 그건 기적일 거라고.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4강까지 올라온 것도 천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남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라있습니다. 이 팀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 일까요. 우리 팀이 정말 결승에...? 말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허나 여기서 멈추면 시시한 노멀엔딩일 뿐이죠. 진정한 기적을 완성하기 위해, 이제 최후의 결전을 이겨야 합니다. 11월 13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있을 조바한과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남은 전력누수가 큽니다. 전광진, 라돈치치가 경고누적으로, 홍철은 아시안게임 대표 차출로 결승전에 결장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얇은 선수 층인데 베스트11 중 3명이 빠져버리다니.. 결승행이 좌절된 라돈이 경기 후 펑펑 우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짠하게 했습니다.
반면 결승에 오른 조바한은 전력누수가 전혀 없습니다. 옐로카드 트러블에 걸린 선수가 그렇게나 많았었는데, 알 힐랄과의 2차전에서 아무도 누적 경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알 힐랄 대신 조바한이 올라온 게 다소 행운이라면 행운이랄까요.

 
라돈.. 그만 울어..    
 
영광의 얼굴들이다   엇, 관중 난입? 기어이 사인을 받아가는 꼬마;
 

■ 마무리

지난 13년간 저는 휴가 여행을 가지 않았습니다. 갈 여건도 안 되고 뭣보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나로선 그럴 여유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자제를 해왔죠.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그 결심을 깨게 됐습니다. 11월 13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리는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직관을 위한 저의 첫번째 일본 여행이 결정되었어요. 만화도, 게임도, 관광도, 그 뭣 때문도 아닌 축구 관람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잠겨있던 일본 여행의 봉인을 해제하게 되다니, 저도 제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성남이 결승 갈까? 결승 갈까? 싶었는데 정말 가버렸으니 이제 뭐 어쩝니까.. 내년에 갈 거 몇 달 가불해서 미리 간다 치는 겁니다(;;).

결승에서 성남이 이길지 질지 모릅니다. 전력누수를 감안하면 확률은 반반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승패를 떠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팀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결승전이 끝나는 순간 저는... 이겨도 울고 져도 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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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0월 30일